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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스타일리시하고, 지금 보니 더 좋은 영화 《7개의 상자 (7 Cajas)》

jul 4, 2026 0 comments


역시나 우연히 알고리즘을 타서 다시 보고 있다. (유튜브에 전편이 통째로 올라와 있던데, 이건 저작권이 어떻게 되는 건가 싶긴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더 빨리, 그리고 많이도 흘렀나 보다.

자연스럽게 자막도 없이 멍하게 화면을 보다가, 문득 내가 이곳 파라과이에서 보낸 시간의 부피를 느꼈다.
그 시간은 살이 제법 쪘다. 아주 포동통하다.

지금은, 아니 지금에 와서야 이 영화가 제대로 보인다. 처음 봤을 때보다 놀라울 구석이 훨씬 더 많다. 물론 영화의 배경인 'Mercado 4(4시장)'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고, 언어적인 이해에만 에너지를 다 태우지 않아도 되니까 배우들의 표정이나 디테일들이 마치 처음 보는 영화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이 영화가 벌써 거의 15년 전(2012년작) 영화구나. 무언가는 많이 바뀌었고, 또 무언가는 전혀 바뀌지 않은 그때와 지금. 알 수 없는 그 '미묘'보다 더 작은 단위의 그때와 지금 사이, 그 시간적·정서적 차이가 살짝 그립다.

예전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흥분이나 공포, 혹은 이국적인 스릴을 느꼈다면, 지금의 나는 같은 장면에서 공감과 슬픔을 본다. 당시의 나는 어렸고, 이 나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지금보다 더 없었으니 화면 안팎으로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를 그저 '상상'하며 즐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당시에 악역이라 생각했던 인물마저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개연성이 넘칠 만큼 충분했다는 게 보인다. 특히 약국에서 자식의 약을 구하지 못한 아빠의 눈빛... 절박함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그 눈은 지금 보니 이 영화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전자상가에 진열된 여러 대의 테레비(?) 앞에 선 빅또르의 모습도 새로웠다. 영화 도입부와 후반부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 티비 스크린들은, 결국 현실이라는 사각지대 속에 사는 빅또르의 꿈의 전파를 역으로 송신하던 매개체였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깨알같이 4시장이라는 배경 속에 한국어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요즘 K-트렌드 관점으로 보면 신선하겠지만, 이건 무려 2010년 즈음에 제작된 영화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산모)의 양수가 터져 마음이 바빠 죽고도 남을 장면에서 과라니어가 섞인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로 언쟁이 벌어지는 장면을 보는데 대사들이 필터 없이 귀에 쏙쏙 박혔다. 아순시온적인 짜증이 명치쯤 올라오던 그 순간, 영화를 비추던 내 모니터의 안과 밖,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라는 천의 조각들이 얼추 그럴싸하게 재봉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 스며든 시간이 검은 모니터에 비친 내 미간의 찌푸림으로 증명되는 묘한 상황.

영화 속 등장인물들 각자의 궁지들(?)은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하나의 길에 몰려버린다.

뭐랄까, 의도조차 약간 모자라서 충분치 않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이건 나도 현실에서 많이 느끼고 마주하는 '어떤 사건의 발생 조건'이다. 누가 궁지에 몰렸다라고 말하려면 '(조금은 분명한 의도라는 걸 가지고) 뭘 했다'가 전제되어야 할 텐데... 이게 참 미묘하다.

이곳에서 살면서 느끼는 이 정서... 나는 알고 있다. 뭔가 하기는 하는데 분명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또 전혀 상관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상관이 있으려는 적극성은 또 없는 어떤 그것. 나한테도 자주 그게 올라오는데, 도무지 설명은 못 하겠는 바로 그것 말이다.

영화는 스토리에서 펼쳐진 난장을 파라과이다운 스타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게'라며 엄지손가락을 슬쩍 들어 올리는 모양새로 소화해 낸다. 참 이 나라답다 싶다.

파라과이는 느끼는 곳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또 재밌는 건, 내가 이 땅에서 일을 하며 이런저런 행사나 자리에서 마주쳤던 배우들이 그야말로 총출동했던 영화였다는 점이다.

랄리(Lali)는 지금이랑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라 했나.. 내 시간은 살이 쪄버렸고, 게으르게 흐르는 것 같다. 이것도 사실 설명을 명확하게 못 하겠다. 나랑 분명히 상관이 있을 법한데.. 나는 적극적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지 않은데, 그게 보였을 뿐.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또렷하게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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